반도신문 | 신동호 스포츠부 기자
용궁포 전통시장 한복판에서 60년째 젓갈 가게를 운영해온 이순옥(74) 할머니가 개발 바람으로 인한 임대료 급등에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다. 하지만 이 작은 젓갈 가게의 위기는 단순한 장사 문제가 아니다. 용궁포 독수리 선수들과 팬들이 30년 넘게 찾아온 ‘팬 성지’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독수리 선수들의 단골집이었는데…”
한미식품이 독수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신인 선수였던 김태준의 아버지가 이순옥 할머니의 멸치젓을 맛보고 “우리 아들 체력에 좋을 것 같다”며 정기적으로 사가기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
“김태준이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 젓갈 먹고 자랐어요. 아버님이 ‘할머니 젓갈 먹고 키운 아들이 프로야구 선수가 됐다’며 자랑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현재 독수리의 간판 타자가 된 김태준은 지금도 가끔 한미식품을 찾는다. 특히 중요한 경기 전에는 “할머니 손맛”을 찾아 젓갈을 사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강훈 투수도 한미식품의 단골이다. “선배들이 ‘저기 젓갈 먹으면 컨디션이 좋아진다’고 해서 처음 와봤는데, 정말 몸에 좋은 것 같아요. 이제는 아예 집에서 반찬으로 먹고 있어요.”
팬클럽의 성지가 된 작은 가게
한미식품이 진정한 ‘팬 성지’가 된 것은 독수리 팬클럽의 역할이 컸다. 독수리 팬클럽 회장 박철수(45) 씨는 30년째 이 가게의 단골이다.
“1994년부터 다녔으니까 정말 오래됐죠. 처음에는 그냥 젓갈 사러 왔는데, 할머니가 선수들 이야기를 워낙 재미있게 해주셔서 자주 오게 됐어요. 지금은 경기 전날이면 팬들끼리 모여서 ‘한미식품 젓갈 나눔’을 하기도 해요.”
박철수 회장에 따르면, 독수리가 중요한 경기에서 승리할 때마다 팬들이 한미식품에 몰려와 젓갈을 사가는 ‘승리 젓갈’ 문화까지 생겼다고 한다.
“2019년 플레이오프 진출할 때, 2021년 창단 첫 우승할 때… 매번 팬들이 여기 와서 ‘할머니 덕분에 이겼다’며 젓갈 사가는 게 전통이 됐어요. 독수리 팬이라면 한미식품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실제로 독수리 팬카페에는 ‘한미식품 젓갈 인증샷’이 정기적으로 올라온다.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원정 온 타지역 팬들도 이곳을 찾아 ‘성지순례’를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임대료 3배…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그런데 용궁포 개발 계획 발표 이후 상황이 급변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월 50만원이었던 임대료가 150만원으로 3배나 올랐다.
“60년 동안 한 자리에서 젓갈만 담갔는데, 이제 와서 나가라니요. 우리 같은 서민이 월 150만원을 어떻게 감당해요.”
이순옥 할머니는 특히 독수리 팬들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선수들이나 팬분들이 ‘할머니, 여기 없으면 안 돼요’라고 하는데… 정말 미안하고 속상해요. 30년 넘게 쌓아온 정이 돈 때문에 끊어지게 생겼으니까요.”
팬클럽 “할머니 가게 지키기” 나서
독수리 팬클럽은 한미식품을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다. 박철수 회장은 “팬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한미식품 살리기 운동’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팬카페에서 논의한 결과, 할머니께 임대료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했어요. 벌써 500명 넘는 팬들이 참여 의사를 밝혔고, 월 50만원 정도는 충분히 모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또한 팬클럽은 “더 많은 사람들이 한미식품을 알 수 있도록” 적극적인 홍보에 나서고 있다. SNS를 통해 한미식품의 젓갈을 전국에 택배 판매하는 시스템도 구축했다.
“독수리 팬들뿐만 아니라 다른 구단 팬들도 ‘한미식품 젓갈’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온라인 주문이 벌써 하루 30건 넘게 들어오고 있어요.”
스포츠 커뮤니티의 전통 공간
한미식품은 단순한 젓갈 가게가 아니라 용궁포 스포츠 커뮤니티의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독수리 경기가 있는 날이면 팬들이 모여 전략을 논의하고, 경기 결과에 따라 희로애락을 나누는 공간이었다.
용궁포 독수리 서포터즈 ‘파도소리’ 회장 이응원(38) 씨는 “한미식품이 없다면 우리 응원 문화도 반쪽이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경기 전에 할머니 젓갈 먹고 힘내자고 하는 게 우리들만의 루틴이었거든요. 그리고 할머니가 독수리 역사를 정말 잘 아세요. 신인 팬들한테 옛날 이야기 해주시는 것도 우리 팬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에요.”
선수들도 우려 표명
한미식품 위기 소식을 들은 독수리 선수들도 우려를 표명했다. 김태준은 “어렸을 때부터 정들었던 곳이 사라진다니 정말 아쉽다”며 “뭔가 도울 방법이 있다면 적극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최강훈 투수도 “팬들과 선수들을 이어주는 소중한 공간”이라며 “독수리 구단 차원에서도 지원 방안을 검토해보겠다”고 밝혔다.
독수리 구단 관계자는 “한미식품은 우리 구단과 30년 넘게 인연을 맺어온 소중한 파트너”라며 “전통 있는 가게가 계속 운영될 수 있도록 구단 차원의 지원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팬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
독수리 팬들의 한미식품 살리기 운동은 단순한 후원을 넘어선다. 팬카페에서는 “전통 상권 보호”와 “지역사회 상생”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박철수 팬클럽 회장은 “야구팬으로서 우리 지역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라며 “스포츠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지역 공동체를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팬들이 직접 나서서 지역 상권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면, 다른 지역 팬들에게도 좋은 모델이 될 것 같아요. 우리가 단순히 경기만 보는 관중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전통과 현대 스포츠 문화의 만남
스포츠 사회학자 김스포츠 교수는 “한미식품 사례는 전통 상권과 현대 스포츠 문화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30년 넘게 이어진 선수-상인-팬의 관계는 단순한 상거래를 넘어선 문화적 유대입니다. 이런 관계가 개발 논리에 의해 파괴되는 것은 지역 스포츠 문화에도 큰 손실이에요.”
김 교수는 또한 “팬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전통 상권을 지키려는 움직임은 스포츠 팬 문화의 새로운 진화”라며 “수동적 관람에서 능동적 지역사회 참여로 발전하는 모습”이라고 분석했다.
미래를 위한 상생 모델
한미식품을 둘러싼 위기는 단순히 한 가게의 문제가 아니다. 전통시장 전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스포츠 커뮤니티가 어떻게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순옥 할머니는 “팬분들이 이렇게 도와주시니까 정말 고맙다”며 “앞으로도 선수들과 팬들이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독수리 팬클럽의 한미식품 지키기 운동이 성공한다면, 이는 전국 스포츠 팬들에게 새로운 팬 문화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장에서의 응원을 넘어 지역사회를 함께 만들어가는 ‘시민 스포츠 문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실험으로 주목받고 있다.
60년 전통의 작은 젓갈 가게가 현대 스포츠 문화와 만나 만들어낸 특별한 이야기. 개발의 바람 속에서도 이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