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된 한옥서 3대 이어온 가족사…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있다”
용궁포 | 윤서진 기자
오전 7시, 용궁포 전통시장 골목 끝자락의 80년 된 한옥 마당에서 이동수 할아버지(82)가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었다. 100평 단층 한옥의 마당 곳곳에는 손자 이민호씨(29)가 어릴 때 심은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계절을 맞아 새싹을 틀고 있다.
“이 나무들도 벌써 20년이 됐구나. 민호가 초등학교 다닐 때 심었는데…” 이동수 할아버지는 나무 한 그루를 어루만지며 잠시 과거에 잠겼다.
이 집은 이동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1943년에 지은 것으로, 3대째 이어져 내려온 터전이다. 본래 150평이었던 대지는 1970년대 도로 확장으로 현재의 100평이 됐지만, ㄱ자형 한옥의 기본 구조는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는 용궁포 앞바다의 풍경은 80년 전 집을 지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평온함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서강철 시장이 발표한 3조원 규모의 용궁포 대개발 사업으로 인해 이 일대 토지 매입 작업이 본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에 태평건설 사람들이 와서 300억을 제시했어요. 집값으로만 따지면 시세보다 3배는 넘는 금액이죠.” 이동수 할아버지는 차분한 목소리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300억원. 용궁포에서 평생을 살아온 서민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돈이다. 주변 이웃들은 “평생 벌어도 만질 수 없는 돈”이라며 부러워했고, 일부는 “빨리 팔고 서울로 이사 가라”고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동수 할아버지의 답은 단호했다.
“돈이 전부가 아니야. 아버지가 지으신 집에서 내가 태어났고, 내 아들이 태어났고, 손자가 태어났어. 이 집 대청마루에서 처음 걸음마를 뗀 민호가 이제 동네를 위해 시장 선거에 나선다는데, 할아버지가 돈 때문에 집을 팔면 되겠나?”
이날 오후 2시쯤, 시장 후보 등록을 마치고 돌아온 이민호씨가 한옥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할아버지, 다녀왔습니다”라며 깍듯이 인사하는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우리 민호가 개발 반대를 한다고 주변에서 욕을 하기도 해요. 300억을 차버리는 바보 할아버지라고도 하고요.” 이동수 할아버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돈보다 소중한 게 있다는 걸 민호가 보여주고 있잖아요.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예요.”
이민호씨는 “할아버지가 지켜주신 덕분에 저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며 “개발과 전통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저희 가족의 꿈”이라고 말했다.
한옥 안채에서는 이동수 할아버지가 매일 아침 손자를 위해 끓이는 된장찌개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나왔다. 40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담근 된장항아리는 지금도 장독대에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된장 맛을 서울 가서도 낼 수 있겠나? 이 마당에서 자란 채소로 만든 김치 맛을 고층 아파트에서도 낼 수 있겠나?” 이동수 할아버지는 고개를 젓는다. “300억으로 살 수 있는 건 집이지, 이 집에 담긴 시간과 기억은 아니야.”
용궁포 전통시장의 다른 상인들도 이동수 할아버지의 결정을 지지하는 분위기다. 60년째 젓갈 장사를 하는 이순옥 할머니(74)는 “이동수씨가 버텨주니까 우리도 힘이 난다”며 “돈이 다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어른이 계셔서 고맙다”고 했다.
한미식품 앞에서 만난 박순금씨(67)도 “민호 할아버지 같은 분이 계시니까 우리 동네가 아직 살 만하다”며 “개발업체들이 돈으로 우리를 내쫓으려 하지만,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의지를 보였다.
이동수 할아버지는 “민호가 시장이 되면 전통과 개발이 조화를 이루는 용궁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그날까지 이 집은 우리 가족의 뿌리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저녁 무렵, 한옥 마당에 노을이 지자 할아버지와 손자는 함께 마당에 앉아 차를 마셨다. 80년 된 집의 기와 위로 떨어지는 석양 빛은 변함없이 아름다웠고, 3대를 이어온 가족의 신념은 그 빛처럼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용궁포=윤서진 기자 yoon.seojin@bandoshinmun.com]